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5·18 민주화운동/전개 (문단 편집) ==== 1980년 – 1990년 ==== ||1980.05.29.||상무관에 안치되었던 5.18 희생자 129명의 시신이 청소차로 운구 되어 망월동 시민묘지 제3묘역에 안장.|| ||1980.05.30.||[[서강대학교]] 학생 김의기가 서울 기독교회관 3층에서 "학살정권 물러나라"를 외친 뒤 투신자살.|| ||1980.06.06.||'5.18 광주의거 유족회'가 발족됨.|| ||1980.06.09.||삼진특수철 노동자 [[김종태(1956)|김종태]]가 <광주 시민/학생들의 넋을 위로하며>라는 제목의 유서를 남기고 분신자살.[br]'''도대체 한 나라 안에서 자기 나라 군인들한테 어린 학생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수백, 수천 명이 피를 흘리고[br]쓰러지며 죽어가는데 나만, 우리 식구만 무사하면 된다는 생각들은 어디서부터 온 것입니까?'''[* 노동자 김종태 열사가 분신 직전 남긴 유인물 <광주 시민/학생들의 넋을 위로하며> 中]|| ||1980.10.25.||보통계엄군법회의 5.18 관련 선고공판에서 정동년 등 5명에게 사형, 변호사 홍남순 등 7명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함.|| ||1980.12.09.||[[광주 미국문화원 방화 사건]]이 일어남.|| ||1981.05.18.||5.18 제1주기 추모식이 경찰의 원천 봉쇄로 무산.|| ||1981.05.27.||서울대 도서관 앞 광장에서 5.18 1주기를 맞이해 침묵시위가 개최됨.[br]이때 서울대생 김태훈이 "전두환 물러가라"를 세 번 외친 뒤 서울대 도서관 4층에서 투신자살함.|| ||1982.03.18.||[[부산 미국문화원 방화 사건]]이 일어났다.|| ||1982.03.31.||대법원은 5.18 관련 구속자 84명의 상고를 기각하고 정동년 등 3명에 사형,[br]김종배 등 7명은 무기징역, 그 외 72명은 징역 15년에서 선고유예에 이르는 판결을 내림.|| ||1982.04.03.||정부는 당초 사형이 확정된 정동년 등 3명은 무기로 감형하는 한편, 나머지 83명은 특별감형 및 사면, 복권 조치를 내림.|| ||1982.05.03.||'횃불회 사건'으로 구속 중이던 기종도가 옥사함.|| ||1982.05.18.||5.18 제2주기 추모식이 경찰의 봉쇄로 무산.[br]이후 유족 30명만이 모인 채 위령제로만 진행.|| ||1982.07.00.||'5.18 광주민중항쟁 유가족 협의회'가 발족됨.|| ||1982.10.12.||5.18 당시 [[전남대]] 총학생회장이던 박관현이[br]광주교도소 수감 도중 교도소의 비인간적 처우에 항의하며 단식투쟁을 하다 옥사.|| ||1983.05.18.||정부가 5.18 당시 희생자의 유족과 부상자에 대한 격리조치를 시행.[br]이에 3주기 추모식이 무산됨.|| ||1983.11.12.||미국 대통령인 [[로널드 레이건]]이 방한.[br]이에 대학생들은 '광주학살 배후조종 등 내정간섭 금지'를 요구하며 반미 시위를 벌였다.|| ||1984.05.18.||6천여 명의 광주시민이 모인 가운데 5.18 4주기 추모식이 무사히 개최됨.|| ||1985.05.18.||5.18 5주기 추모식 개최.[br]이날 야당, 재야인사, 종교인 등 500여 명이 참석했다.|| ||1985.05.23.||[[서울 미국문화원 점거농성 사건]]이 일어났다.[br](5월 23일부터 26일까지)|| ||1985.08.15.||시민군 출신 노동자 홍기일이 금남로 1가에서[br]<8.15를 맞이하는 뜨거움의 무등산이여!>라는 전단을 뿌리고 분신자살.|| ||1987.06.29.||[[6.29 선언]] 발표로 전두환 정권이 민중의 저항 앞에 항복함.|| ||1987.11.08.||'5.18 광주민중항쟁 동지회'가 발족됨.|| ||1988.05.18.||18일부터 27일까지 준합법적인 5.18 기념행사가 개최되었다.|| ||1988.07.08.||국회, 5.18 광주민주화운동 진상조사 특별위원회 구성.|| ||1988.11.23.||외무부, 윌리엄 글라이스틴 전 주한 미국대사와 존 위컴 전 한미연합사령관에게[br]광주특위에 출석해 증언하도록 요청하는 광주특위의 서한을 [[주한미국대사관]]에 전달.|| ||1988.12.02.||미국 국무부, 위컴과 글라이스틴이 광주특위에 출석하는 것이 부적절하다는 입장 발표.|| ||1989.01.09.||국회 광주민주화운동 진상규명 특별위원회 소속 정웅 의원 등이[br]5.18 당시 공수부대 주둔지였던 주남마을 현장 발굴 과정에서 변사체 1구를 발견했다.|| ||1989.01.16.||5.18 당시 특전사 중사가 [[주남마을 총격사건]]에 대해 양심선언을 했다.|| ||1989.02.03.||최초의 5.18 관련 다큐멘터리 <어머니의 노래>, MBC에서 방영.|| ||1989.03.08.||5.18 관련 다큐멘터리 <광주는 말한다>가 KBS1에서 방영.[br]박희태 민정당 대변인은 "우리가 믿고 사랑하던 KBS의 품위, 양식 깊이가 그 정도밖에 안 되는지 실망치 않을 수 없다"라며 개탄.|| ||1989.03.17.||[[주한미국대사관]], 광주특위가 준비한 48개항의 질의서를 국무부에 전달.|| ||1989.06.20.||미국 국무부는 [[미국 정부]]가 광주에 특전사 대신[br]20사단의 투입을 마지못해 승인했다는 답변서를 광주특위에 제출했다.|| ||1990.08.06.||광주 피해자 보상법 제정||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